2012/01/29 22:31

동시대인으로 동료로. 개발에서 연대로. 개발 학/업 노트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엄기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네 번째 자살이 있고 난 다음 언론에도 트위터에도 카이스트를 다룬 글이 넘쳐났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온갖 비판과 대책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많은 글을 내내 머릿속에 두 가지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지금 슬퍼하고 있는 걸까 묻고 싶었다. 슬픔이 묻어나는 글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을 공격하고, 이명박 정권의 교육 정책을 성토하고,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읽으며 글쓴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읽는 내내 찝찝함 같은 느낌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단지 나와 그들의 정서가 다르기 때문 많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글에서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이 사건에서 글쓴이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예감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글은 아무리 날카롭더라도 동시대인의 글을 아닌 셈이다. (P70)

이 수많은 글들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의문이 들었다. 한 진보논객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가끔 우리는 우리 글을 읽지 않아도 이미 우리 편인 사람들을 향해 말을 한다. 일종의 팬들에게 말을 거는 셈이다. (중략) 그러나 글은 굳이 그 글을 읽지 않아도 될 사람과 유대감을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읽는 사람을 동시대인으로, 동료로 초대하는 행위가 아닌가. 글이란 결국 동시대인을 동료로 초대하는 정치적인 행위이며, 이 정치적 행위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일이 아닌가. 교실에서 학생들과 만나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꿈꾼 것은 이들과 내가 동시대인이 되는 것이었다. 동시대인이 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나와 나의 운명이 별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논평만이 아니라 이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너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공명해야 한다. 각자의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는 사건은 사건으로서 무의미하고, 기억을 끄집어내고 이어주지 못하는 글을 글로서 가치가 없다." (p70)

카이스트에서 발생한 죽음을, 우리 사회의 유령의 죽음으로 보편화하지 못하고 그저 카이스트라는 제도의 문제(problem)로만 바라봄으로서 우리 모두가 유령임을 확인할 수 있는 문제(issue)로 문제화(problematic)하지 못했다. 사건은 경계를 넘어 고통과 기억의 연대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사건은 영영을 넘어서야 한다. 너의 고통이 카이스트라는 경계에 갇히고, 나의 고통이 연세대 혹은 상지대라는 범주에 갇혀버렸을 때 타인의 고통은 결코 우리에게 공명될 수 없다. 이것은 사회가 그어 놓은 제도의 벽에 부딪혀 끝없이 좌절된다. (p89)

국제개발은 공평성(equity)와 사회 정의(social justice)의 문제이고, 수직인 세상을 수평하게 바꿔가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개입이기보다는 연대이다. 국제개발협력이란 단어가 우리의 상상력을 좁히고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연대의 폭을 제약한다면 이 말은 누구를 위해 왜 남아있어야 하는 것일까.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사회적으로 소외를 겪는 사람들의 고통과 우리의 고통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지금 우리를 돌아보는 데에서 시작된다. 고도로 자본화된 사회의 모습이, 한국 사회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삶이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바로 그 삶인지를 물어야 한다. 개발과 저개발의 수직적 시간틀을 깨고 동시대인으로 살며, 동시대인으로 겪는 아픔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우리의 대화는 글쓰기는 어떠해야 할까. 국제개발협력 담론이 어떻게 구성되고 공유되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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