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6/01 06:43

우리는 경험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다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1. "4대강 사업 즉각 중지하라,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문수 수님이 몸을 던져 부처와 중생과 자연에 공양했다. 묵언에 가깝게 말을 아끼며 수행한 끝의 결단이었다.
 
2. "나는 실정을 몰라서 반대하고 있다는 말에 심한 모욕을 느낀다. 정치적 목적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말은 한층 더 모욕적으로 들린다. 나는 지금 내 양심을 몽땅 걸고 4대강사업에 반대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경제학자로서의 양심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경제학자 이준구 교수가 목소리를 내었다. 그의 말처럼 인간, 시민, 지식인, 경제학자로서 세상에 내보인 글이고 행동이다. 
 
3. "이명박 퇴진을 외치기 전에 먼저 숨통을 끊어놓아야 할 것은 ‘우리 안의 이명박’이다. 우리 안에 한 명씩 가지고 있는 음습한 이명박, 그를 먼저 끝장내야 한다." 김규항의 '우리 안의 이명박'론. 어떤 비판을 붙이더라도, 김규항의 목소리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데에는 큰 이견이 없다. 참다운 래디컬은 민족, 정치, 어쩌면 계급마저 넘어선 지점에 있다. 젊은 날의 서준식 선생은 그 지점을 '인권'이라 했다. 자신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이 타인도 존중할 줄 안다. 김규항의 저 글은 '자신의 인간됨을 스스로 존중하는 힘이 어디서 오는가'를 묻는다. 
 
4. 그리고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의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사. "저들은 천암함 사태의 수많은 의문들을 다 입막음하고 미국의 핵잠수함끼지 끌어들이겠다면서 한반도 위기 상황을 극한까지 몰아갑니다. 선거 한번 이겨 보겠다고 전쟁까지 불사하겠다는 저 파렴치한 자들입니다. 당신은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저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 놓고도 자신이 한 일을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저들입니다. 민주주의도 인권도 남북의 화해협력도 다 무너졌지만 재집권할 생각에 거칠것이 없는 저들입니다. 떠나신 당신 앞에서 우리 앞에 남은 질긴 욕망의 끈을 끊겠습니다. 역사의 후퇴 앞에 목숨을 끊은 당신 앞에서 손톱만한 욕심이라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도 지워버리겠습니다. 절벽에 몸은 던진 당신 앞에서 그 어떤 변명뒤에 숨을 수 있겠습니까. 생활의 무게조차도 내려놓겠습니자. 주저하면서 역사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함께 손을 잡겠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이해 미래를 짓밟는 자들 앞에서 우리 손을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5. 김규항에 뜨끔하고, 이정희의 추모사에 먹먹해 하면서, 숨찬 분노를 가슴에 안고, 하지만 별 무리없이 고냥고냥 소시민 라이프를 이어간다. 김규항처럼 절박하게 반성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정희만큼 결연하지 못해서일까. 이런 생각 끝에 읽는 김종엽의 글이 반갑다. 무색하지 않기 위해 더 뻔뻔해지고, 스스로 힘을 빼고 못나게 굴려는 이들을 차분하게 설득한다. 범속해도 괜찮다고, 개개인의 의지와 능력, 결연함이 좀 모라자도 괜찮다고, 그 부족함을 안고, 작은 힘들이 모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보다 크게 나을 것 없는 우리 자신의 속물성을 지적하며 그것을 선결과제로 내세우는 ‘발본적’ 비판은 나쁜 것과 덜 나쁜 것을 분별하는 ‘지상의 척도’를 세우기 어렵게 하고, 사회적 투쟁 의지를 죄의식으로 물들인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이란 자신의 비판 행위와 공적 발언의 일치를 지향하며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정화하는 존재라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앞으로 내던지는 방식으로 성찰이라는 과제를 이행하기도 하는 존재라는 점을 무시하게 된다. 나는 많은 우리 사회 성원들이 속물적이기보다는 범속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성인의 도를 따를 만한 의지와 능력이 모자라더라도 제도적인 기회가 열린다면 자신 안에 있는 속물적 성향보다는 더 생태적이고 더 평등한 삶에 대한 지향을 발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김종엽)
 
6.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며, 응징의 의지(라고 쓰지만, 사실은 투표뿐)를 마음 한켠에 새겨둔 채, 며칠 동안 '불평등을 완화하는 성장' 혹은 '빈곤친화적 성장'(pro-poor growth, inclusive growth)과 관련한 글들을 읽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경제 성장의 흐름 속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또 다시 소외되지 않도록,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고 혜택이 돌아가는 성장을 해야한다는 문제 제기를 담은 것들이다.

7. 어떤 글은 '시장 지향적 성장'이 심화되는 불평등을 완화할 열쇠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신용을, 생산한 농산물을 제 가격을 받고 거래할 시장을, 기후변화에 대비한 보험을, 기술 혁신의 혜택을 적절한 가격에 누릴 수 있도록 소비자로서의 힘을 주는 것이 빈부 포괄적인 성장을 이끄는 효율적 방법이란 것이다. 반면 어떤 글들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결과의 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공공 섹터의 강화를, 토지를 재분배하고 재산권을 보호하는 제도적 개혁의 필요성을 말한다. 시장과 경제 성장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빈곤을 완화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8. 처방의 우선순위는 각기 달라도, 이 접근법이 공유하는 가치는 근본적으로 같다. 빈곤은 단순히 소득증대의 문제가 아니며, 'big push'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란 점이다. 빈곤은 '저소득'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빈곤의 일종의 무력감, 좌절, 궁핍,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배제, 공공 서비스와 금융기관과 그 밖의 공적인 지원처를 향한 접근성의 상대적 부족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렇게 다면적인 빈곤의 반대는 (소득증대가 중요하지는 하지만) 단순한 부가 아니다. 빈곤의 반대는 비경제적 잣대들을 포함하는 '웰빙' (well-being)이다.(Robert Chamber)

9. 그렇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빈곤완화를 이끄는 것은 맞지만, 경제성장만이 빈곤과, 빈곤으로 인한 부자유를 제거하는 유일하고 특권적인 방법인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은 정치적, 사회적 기회들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그런가하면, 경제가 성장한다고 해서 빈곤층의 소득이 반드시 높아지거나 삶의 질이 반드시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빈곤은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으므로 빈곤으로 인한 박탈과 부자유를 없애는 데는 경제성장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필요하다.

10. 그래서 '빈곤에서 소득증대로'라는 말을 넘어, '빈곤에서 권력으로'라는 말이 나온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정의하는 '웰빙'이 무엇인지, 경제적 인디케이터를 넘어, 그들의 목소리가 드러나고 전해져야 한다, 그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같이 사는 한, 가난의 여부를 떠나 어느 누구라도 가장 약한 자들이 스스로 정의한 그 웰빙을 훼손하지 않도록 책임있게 잘 살아야(responsible well-being)한다.
 
11.  상황에 답답함과 분노를 느끼면서, 또 이런 내용을 담은 글들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이렇게 읽고 공부하는 것들이 그저 '지구 저편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까지 국제개발학이라 하면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공부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돕기 위해, 혹은 그걸 핑계로 오히려 방해되는 일들을 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준비라고 여겼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들으면 먹먹하고 안타까웠고, 그에 덧붙여진 비효율과 특정 집단의 탐욕을 생각하면 화가 났지만, 그럼에도 그 반응들에는 어쩌면 얼만큼의 '거리'란 게 있었다. 다르다.. 다르니 같아지도록 돕겠다... 하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덥게 하는 불길이야 많지만, 가장 급한 불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저곳에 있지 않나 하는 마음.

12. 그런 생각이 무참하게 부끄러운 날들이다. 가장 급한 불을 끄는 걸 돕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다급함만 봤지, 정작 내 스스로가 불씨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성실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것 같다. 발전국가 시절부터 MB정부에 이르기까지 '개발'이란 단어가 쓰이는 맥락을 되짚지 않는 한, 그 한계를 넘어 넓어지고 다양해지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 다시 배우고, 그 과정에서 내가 진지하고 즐겁고 유쾌하지지 않는 한 ... 어쩌면 '개입'이란 무책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어느 땅에든, 지구 저쪽에서든 이쪽에서든 같이 배워가는 것이고,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 뿐이다. 

13. 다시 꺼내어 읽은 <만남 - 서경식 김상봉 대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서경식 선생의 말이다. "우리는 오직 경험의 공동체 안에서 '우리'입니다. 식민지배의 고통과 저항을 '우리'의 틀로 삼는다면, 거기에는 저처럼 언어적으로 부족한 사람(한국어가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포함될 수 있는 겁니다."
 
"중앙아시아에 살며 러시아어밖에 못하게 된 조선 사람, 연변의 조선족, 재일조선인, 모두 제국주의의 폭력에 의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언어가 다르고 심지어 피부색까지 달라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바로 우리는 그렇게 다르게 만든 그 역사 속에서만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20세기의 정치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고난을 나눈 자들로서 우리'라는 더 넓은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기준을 역사의 경험과 기억에 두지 않고 저와 같은 디아스포라들이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내부인들의 고유한 언어나 정서 같은 것에 두게 되면 그것이 중심이자 잣대가 되어 충분하다거나 미흡하다는 식의 선별과 배제를 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P70)

14. 우리는 오직 경험의 공동체, 고통의 공동체 안에서만 '우리'다. 2010년 한국에서 삼십대를 보내는 나와 똑같은 시간에 저개발국 혹은 가장 가난한 나라의 농촌 마을에서 삼십대를 보내는 당신. 나와 당신은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나와 당신이 공유하는 경험, 함께 겪고 버텨내는 고통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나는 2010년 한국을 장악한 노골적인 계급주의, 무너지는 인권, 불평등, 불도저 개발주의에 마음을 앓는다. 당신도 어쩌면... 그러면 나와 당신은 '우리'다. 언어가 달라도, 사는 곳이 다르고, 얼굴색이 달라도.

15. 그래서 당신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당당하게 화를 내야지 한다. 세끼 꼬박꼬박 먹고, 따뜻하게 자는 것이 당신 앞에 부끄럽지도, 미안하지도 않다. 내가 조금 더 가졌다고, 조금 더 배웠다고 그걸 당신과 나의 다름으로 받아 들여서, 그래서 당신과 나의 같음을 외면한다면 그게 가장 부끄러운 일이다. 나도 아프고, 당신도 아프고, 나도 싸우고, 당신도 싸우고.... 그 안에서 당신과 나는 '우리'이다.


덧글

  • 2010/06/01 22:38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cklist 2010/06/02 09:03 #

    공감해주시니 무엇보다 반가워요... 위에 글에 쓴 생각들을 한동안 머릿 속에 넣고 다니느라... 답답했거든요. 말도 안 나오고, 글도 안 써지고, 할 말이 없는 것도 같고, 있는 것도 같고, 화는 나고....그렇더라고요.

    세수 하고, 투표 하러 가야겠네요.. (지금 일어났어요, 9시 ㄷㄷ)
  • 2010/07/22 00:39 # 답글

    우연히 전에 쓰신 글을 읽게 됐네요.
    크게 공감하고 갑니다.

    무엇보다도 '개발' 혹은 '성장' 이라는 단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 같아요.
    우리는 더 부수면 부술수록 낭비하면 낭비할수록 (GDP상으로) '성장'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이렇게 넘치고 흐를만큼 생산해내면서 어느 한편에서는 그것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채로 굶거나, 병들어가고 있는 현실.
    성숙한 사회라면 소수에 의해 사회의 실제적 필요와는 무관하게 무제한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이 아니라, (위에 언급된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약한 사람을 포함한') 실제 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필요한 만큼을 계획해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생태주의나 민주주의와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 많은 밤이네요...
  • cklist 2010/07/22 03:19 #

    넵, 저 역시 생각 많은 밤이에요... 반갑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개발' '성장'에 이란 말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식을 샅샅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좀 거리를 두고 넌지시 봐야하는데... 안에 빠져만 있으면, 더 불안하겠죠. 허우적거릴 것 같아요.

    우리가 개발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국제개발협력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개발이란 말을 두고는 마음이 복잡하네요.

    생태주의를 언급하신 부분이 흥미롭네요. 공감하고, 좀더 알고도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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