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14 01:51

"국제개발처럼 천의 얼굴을 가진 것이 없다." 개발 학/업 노트

이제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어쩌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국제개발(International Development)'은 곧 '빈곤 완화'(Poverty Reduction 혹은 Alleviation), 그리고 가난한(deprived)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좋은 변화'에 대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것 같다. 발전경제학도, 농업, 보건, 교육 등의 각 섹터에 대한 논의도, 원조나 개발 프로젝트, 사회혁신기업도 모두 그 틀에 넣어 해석하고 이해했고, 가장 중요한 이해당사자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라 여겼다. 적어도 '국제개발' 이란 말을 두고, 원조를 통한 경제 관계 강화, 민간 기업의 비즈니스 기회 확장 같은 얘기를 가장 먼저 생각하지는 않았다. ODA를 국제개발의 전부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국제개발협력'의 인력전망을 토론하는 자리에 참석하고 많이 놀랐다. 코이카, 국제NGO, 국제대학원, 직업능력개발원, 민간 개발전략 컨설팅사의 담당자 분들이 각기 '국제개발협력'을 얘기했는데, 그 토론에서 '빈곤 완화' '인권으로서의 개발' '좋은 변화' 등의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원조 예산 증대로 인해 생긴 블루오션' '파이가 커질 분야' '경제협력 강화' '세계원조시장에서의 경쟁력 확보' '민간 기업의 비즈니스에 협력하는' '해외 개발 프로젝트 수주의 기회' '국제입찰과 조달' 이란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중 어느 분야에서든 전문가가 되라는 조언도 들었다. "기업의 입장에서 국제 개발 사업은 비즈니스일 뿐이고, 다른 것이 있다면 펀딩의 소스가 다를 뿐이다.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국제개발 인력이 기업에서 할 일이 많다"는 얘기도 있었다. 국제개발협력 전문가의 직업 전망 질문에 대한 대답 가운데 하나였다.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당장이라도 손을 들고 저마다 '국제개발'을 무엇이라 정의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세계원조 시장에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는 게 '국제개발'이라면, 사업 대신에 '산업'이라고 부르는 게 낫다는 생각도 했다.

국제개발의 틀 안에서, 빈곤완화는 하나의 '섹터'로써 자리한다. 이 말은 국제개발의 목표가 빈곤완화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보다 넓은 목표는'좋은 변화'다. 좋은 변화가 경제 지표로 평가되는 성장인지, 지속가능한 성장인지, 보존인지, 변화의 뱡향과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어찌보면, '국제개발=(가장 가난한 사람들의)빈곤완화'로 생각하고 그 절박함을 봐온 내가 오히려 엉뚱한 걸지도 모른다. 국제개발협력의 아주 일부분만 봐온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엉뚱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었다. 엉뚱한게 낫다. 인력전망에 나를 맞추기보다 내가 갖고 있는 것, 내가 생각하는 국제개발, 내게 의미있고 중요한 가치 안에 머물고 성장하는 게 낫다. 오늘 들은 이야기 가운데 도움이 된 말은 이것 하나다. "개발이라는 것처럼 천의 얼굴을 가진 것이 없다. 양면을 동시에,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개발이란 뭔가에 대한 이해를 쌓고, 기초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앞으로 수도 없이, 저 '천의 얼굴'을 마주치며 일하게 될 거란 직감이 들었다. 그중 어떤 얼굴 앞에서는 기겁하고, 낙담하고, 혼란스러워 할지 모른다. 그런 표정이 있음을 인정하되, 닮지는 말자고, 국제개발 일이란 그것보다 넓고 깊고 두텁고 살갑고 생기있는 것이라고, 하나의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는 것 자체라고, 그렇지 않으면 시작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을 다진다.

그리고 마음 복잡한 밤에 다시 펴보는 책. 니체가 진작에 일러줬다.
저 글의 '철학자'를 국제개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바꿔서 읽는다.

철학자는 먼저 "꿀을 많이 모은 꿀벌"이지 않으면 안된다.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스스로 건강한 사람만이 병을 옮기지 않고 치료를 할 수 있다. 철학을 하려거든 행복해지는 법, 건강해지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우리는 먼저 "책을 통해서 사상을 더듬는 일당들", "배를 압박하고, 머리를 종이 위에 쳐박고 있는 일당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

"문 밖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걷고, 뛰고, 오르고 춤추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환하게 웃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지혜의 친구"인지, "진리의 노예"인지는 진리를 대하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춤을 잘 추다보면 획일적 리듬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환하게 웃다보면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사회의 엄숙함에 더 크게 웃게 된다. 발이 정말로 가벼워지면 "대지 위에 늪과 두터운 비애가 있다고 해도 쉽게 건너뛰고 달릴 것이며 마치 빙판 위에서처럼 멋지게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좋은 해석을 위해서도 좋은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된다. 해석하기 위해서도 실천이 필요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대로 "삶의 방식을 바꾸기 전에 병은 낫지 않는다." 단 한번도 니체는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느끼는 자에게는 불필요한 말이 될 것이며, 느끼지 못하는 자에게는 소용없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르쳐준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맛보는 법이다. 진리란 머리만이 아니라 몸으로도 반박될 수 있다. 불쾌한 음악은 발걸음만으로도 반박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하려거든 맛보는 혀부터, 냄새맡는 코부터, 바라보는 눈부터, 소리를 듣는 귀부터, 그리고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부터 바꾸어야 한다. 조금만 어두워지면 색맹이 되고 마는 철학의 시력을 우리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 고병권,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길> 에서 발췌.

덧글

  • Yuri 2010/05/14 20:57 # 답글

    글 잘 읽었습니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아직 힘든 부분이 많네요.휴..
    저 역시 요즘 마주하게 되는 많은 것들 때문에 기겁하고, 낙담하고, 혼란스러워 하기도 했는데, 말씀이 맞네요. 그런 표정이 있음을 인정하되, 닮지는 말자고. 힘 얻고 갑니다.
  • freshwater 2010/05/14 22:04 # 삭제 답글

    밤12시가 다되가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을 꺼 같아요. 저도 어제 버스타고 집에 가면서 오늘 아침 출근길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국제개발'은 무엇일까 고민했답니다. 이 길을 가기전에 나의 '국제개발'에 대한 가치를 굳건히 하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가치안에서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놓지 말아야 겠어요^^
  • cklist 2010/05/15 08:13 # 답글

    Yuri 님 / 이글루스에 문제 있는지, 답글 저장이 안 되네요.

    저 글을 쓴 밤에 머리도 마음도 좀 복작복작했어요.
    기겁하고 낙담하게 만든는 것들에 하나하나 '반응' 하자면 힘이 빠지고...
    '실망스런 것에 실망했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자니 에너지가 딸려요 -_-;;

    힘 내시니, 저도 기운냅니다.
    좋은 토욜 아침! 베트남과 한국 시차가 4시간 이던가요?
    몇년전에 여행한 적 있어요. 호이안이 종종 생각나요.
  • cklist 2010/05/15 08:20 # 답글

    freshwater 님아 / 그날 밤에도 생각한 건데, 우리 대화.. 해독제 같았어. 아니면 우리가 농담 삼아 얘기했던, 그 무슨 테라피라든가. 이렇게 같이 경악(-_-)하고, 낙담하고, 고민하고, 또 웃을 수 있어서 좋아. 우리는 다르게 할거야... 그 전에, 일단 엠티부터 갈까...? ㅋㅋ
  • 청경채 2010/05/16 21:30 # 답글

    국제개발.. 국가관의 관계를 어느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서 국제개발의 성공척도도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어떠한 강제권한도 없는 세계질서 안에서 국가는 자기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개체들이라고 보는 리얼리즘의 관점에서 보는 국제개발은 투자-수익의 틀에서 성공여부를 판단 할 것이고, 국제행위의 주체가 더이상 개개의 정부로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이익집단과 비정부기구로 확대 되었고, 그들의 행위 동기는 그들이 부여하는 "가치" 이며, 공통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조직간의 상호작용이 국제관계의 흐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구조주의의 경우, 국제개발원조의 성과 평가는 NGO의 갯수만큼이나 많아 지겠죠..
  • 청경채 2010/05/16 21:36 # 답글

    우리나라의 국제개발 생태계를 보면 위에서 말한 리얼리즘의 틀에서 국제개발을 보는 경우가 많은것 같고 또 당연히 그런거 같아요. 거기 수장으로 있는 분들이 대부분 미국에서 국제관계나 경제학을 전공하신 분들이고, 아직까지 이분야 주류이데올로기가 리얼리즘이니까요.. "땅따먹기" 판에 끼어 들려면 역시 리얼리즘의 틀로 국제개발을 보고 어떤 가치를 위한다기 보다 "국익"을 위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더 신나게 일할수 있는 생태계인것 같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도 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가진 기업들이 생겨나게 되고, 빌앤말렌다게이츠재단 같은 규모의 재단이 생겨나고, 우리 대중의 인식이 좀더 깨인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비로소 위에서 말한 "구조주의적" 접근이 가능해 질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까진... 그때 까페에서 이야기 나누었던 것 처럼 너무 요원한것 같아요...
  • 청경채 2010/05/16 21:40 # 답글

    그래서 이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땅따먹기 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느끼는 "영혼" 을 소유하신 분들이 "한국인으로써 국제개발 전문가" 가 되려는 고민이 더욱 더 치열해 지는 것 같고.. 시대를 앞서나가는 사람들의 고뇌를 겪는거 같아요.. (쿨럭) .. 그 지향을 버리지 않으려면, "땅따먹기" 판에 뛰어 들어 자기 판을 조금씩 넓혀 나가거나 (한마디로 수은이나 코이카나 JPO나 외시 본다는 뜻) 아니면 자기만의 텃밭을 조금씩 일궈 나가면서 개개인의 "머쓸" 을 키우거나... 크게 두갈래길 인거 같아요.. 단 어떻게 텃밭을 일구고 머쓸을 키울건가는 개개인의 답이 있겠죠.. 영국학위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저처럼 취업이 될 수 도 있을것이고.. 뭘 하든.. 영혼을 팔지 않아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Yuri 2010/05/17 01:30 #

    영혼을 팔지 않아야... ㅎㅎㅎ
    청경채 님 말에 동감이네요.
    제발 정신적 빈곤에 시달려서 순간의 유혹으로 헐값에 내 영혼이 팔리지 않기만을 바랍니다.ㅋ
  • 김동훈 2010/05/17 09:54 # 삭제 답글

    좋은 글 퍼가고 다른 분들과도 공유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가슴 한켠이 아프네요...니체의 말은 정말 가슴에 와닿고요...한국내의 상황이 그리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곳곳에서 새로운 실험과 도전들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변화는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하재웅 2010/05/17 15:16 # 삭제 답글

    사실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한다고해도, 관련 인프라에 투자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말만 무성한 국제개발협력 전문가 양성이라... 많이 아쉽습니다!! 김현주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철학에 대한 문제가 가장 핵심이고, 이러한 문제가 깊이 있는 논의로 들어가면 항상 대두되는데, 결론은 항상 이매하네요! 진정한 개발원조철학을 마련하기 위한 로드맵 그리고 이를 실현화할 구체적인 조직들의 연대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 cklist 2010/05/17 17:47 # 답글

    청경채 님 / 며칠전부터 댓글에 대한 '답글'이 안 써지네요. 이거 그냥 기다리면 고쳐지는 걸까...

    저 댓글은 토욜에 나눴던 한 시간 넘은 대화의 요약,&결정판이네요.
    내용도 결론도 모두 갈끔한 정리다... !

    영혼을 팔지 않으려면... 영혼을 잘 가꾸고 풍성하게 가꿔서 그 자체로 즐겁게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사는 게 행복하지 않은데 영혼인들 지켜질까 싶고요. 말씀하신대로 개개인의 힘을 키우고, '따로 또 같이' 일하면서, 우리나라 국제개발이 조금씩 멋지게 커나가는 모습을 같이 봤음 좋겠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국제개발의 모습이 하나둘 늘어나면, 그것도 분명히 현실 중의 하나가 되겠죠.
    '무엇이 현실적인가' 에 대한 끈없는 실험.. 같이 해봐요.
  • 청경채 2010/05/17 21:10 #

    "사람" 과 "네트워크"가 핵심이죠... 요즘같이 SNS가 잘되어있는 세상에, 특히 전세계 뿔뿔히 흩어져 있는 우리들이 뭔가 한지붕 아래 뭉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으면 정말 좋겠네요.. 다음 까페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인지라... 누군가 비젼을 가지고 총대를 맸으면 좋으련만... gp3쪽은 어떤가 모르겠네요..
  • cklist 2010/05/17 17:49 # 답글

    Yuri 님 /

    "제발 정신적 빈곤에 시달려서 순간으 유혹으로 헐값에 내 영혼이 팔리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ㅋ"

    과연 단어 하나하나, 팍팍 와닿네요. 내공 엿보이심^^
  • cklist 2010/05/17 17:56 # 답글

    김동훈 님 / 좀 쑥쓰럽긴 해도, 이런저런 생각들 공유하고 싶어서 적었어요. 생각과 마음 나눠주시고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새로운 도전과 실험... 넵!
  • cklist 2010/05/17 17:58 # 답글

    하재웅 님 / 이렇게 인사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운영하시는 블로그의 조용한 구독자에요^^
    개발원조 철학에 대한 고민, 이를 실현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10000% 공감합니다. 늘 생각했던 거지만, 이번에 저 토론회 자리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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