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재화나 서비스의 공급량은 수요에 의해 결정된다는지 가격은 상대적 희소성을 반영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원하는 수준 이상으로 커피가 남아돌면 가격은 떨어져야 하고 생산은 감소돼야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양보다 휘발유가 모자라면 가격은 올라야 하고 소비는 감소해야 한다.
이같이 경쟁시장의 합리적 편성이 가능할 경우, 가격은 시장이 정하게 하고 분배정의의 문제는 소득 쪽에서 해결하자는 것이 아바 러너(Abba Lerner)를 비롯한 좌파 경제학자들이 선호하는 방침이다.
그러나 가격 조정으로 분배 정의를 추구하려는 좌파의 목소리 역시 강렬하다. 예컨대 전기요금을 살펴보자. 절전과 지구온난화에 대한 해답은 지극히 명백하다. 전기 값을 올리면 된다. 미국에서는 각 주를 비교 연구한 결과, 킬로와트 당 전기 요금을 전국 평균가격을 기준으로 1센트씩 인상할 때마다 전력 소비가 7퍼센트씩 감소하더라는 결과가 나왔다.
좌파는 이런 주장을 공격하며, 전기 값이 인상되면 저소득층이 피해를 본다고 불만을 표한다. 그럼 잠시 계산을 해보자. 전기 요금 고지서에 씌어 있는 청구금액의 절반 정도는 송전비용이고 전기료 인상의 영향을 받지 않는 부분이다. 따라서 전기료를 30퍼센트 인상해도 저소득층이 내야 할 금액은 소비행동에 변화가 없다고 가정했을때 1년에 100달러 정도 오른다. 케나나 인구의 20퍼센트란 약 250만 가구에 해당하므로 전기료를 기존대로 낮게 유지하면 최저소득층에 약 2억 5000만 달러의 혜택을 주는 셈이다.
이는 다른 보조금과 비교해 대단치 않은 숫자다. 그런데도 정부는 저소득층에게 이렇게 낮은 수준의 보조금을 주기 위해 전 국민에게 값싼 전력을 공급한다. 이보다 더 비효율적인 사회정책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때문에 전력 과소비 현상이 만연하게 될 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소득에 대비해도 극도로 역진적이다.
요컨대 전기 요금을 조절하는 것은 분배정의라는 문제의 해결 방법으르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이보다는 전력의 진정한 비용을 사람들에게 부과한 다음 (외부효과까지 포함한), 정책 변화로 인해 곤경에 처한 빈곤층에게는 따로 소득 이전을 해주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가격통제는 추천할 만한 정책이 못 된다. 아바 러너는 이렇게 말했다."소득 재분배가 필요하다면 직접적인 소득이전이 최선이다. 재화의 최적 배분을 희생시키는 일은 경제적으로 불필요하다."
한편 좌파가 가난한 소비자를 염려해 가격 인상에 반대하거나 가격 인하를 바라는 사례와 더불어, 가난한 생산자를 염려해 가격 인상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공정무역이다.
특정 종류의 공정무역 운동은 선진국의 소비자는 부유하니까 저개발국에서 수입한 재화를 시장가격보다 높게 지불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개발' 프로그램에 기여하는 자선행위 대신에 저개발국가에서 수입한 물건을 시장 가격 이상을 내고 사라고 제안한다. 이러한 발상은 1991년 더 바디샵(The Body Shop)이 도덕적 우월감을 약간 풍기며 시행하던 '원조가 아닌 무역'(Trade not Aid)' 캠페인을 통해 대중화되었다.
자전적 가격 정책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캠페인은, 소득만 분배하고 가격은 그냥 놔두러던 러너의 권고를 정면으로 거스르던 방침이었다. '원조가 아닌 무역' 캠페인은 소득분배보다 가격조정을 선호했다.
공정거래 커피의 경우도 비슷한 예다. 공정거래 커피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2001년 커피 위기를 맞으면서 이 운동에 상당한 힘이 실렸다. 당시 세계 시장에 커피 공급이 지나쳐 커피 도매가격이 참담할 정도로 하락했고, 그로 인해 큰 피래를 입은 빈곤 국가들을 위한 해결책으로서 공정거래 커피의 판촉이 활발해졌다.
한편, 커피의 과잉생산이 문제의 근원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옥스팜은 2001년 전 세계 커피 원두 수요가 연간 1억 50만 자루였던 데 반해 커피의 총 공급량은 1억 1,500만 자루였다고 계산했다. 이러한 공급과잉은 생산 증가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커피 소비 감소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실상 커피 값의 하락은 시장실패 때문이 아니라 희소성에 의한 가격 결정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옥스팜은 적어도 공정무역으로는 커피의 과잉공급이라는 근본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자선적 가격 정책을 제안함과 동시에 남아도는 커피를 없애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커피 원두 500만 자루를 구입해 폐기 처분할 것을 권고했다. 이게 바로 '원조가 아닌 무역'으로 초래된 결과의 적나라한 본모습이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금전적인 원조를 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누군가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농산물을 기르도록 내버려두는 대신(존재하지도 않은 서구 소비자를 위해 그 많은 땅과 노동력이 커피 재배에 소모되지 않았으면 사람들한테 정말 필요한 식량 생산에 대신 투입될 수도 있었다), 필요도 없는 작물을 기르도록 물건 값을 지불한 뒤 구매한 물건을 폐기 처분하는 것이다.
더바디샵도 '원조가 아닌 무역' 캠페인을 벌이다가 매우 유사한 문제에 봉착했다. 더바디샵은 아프리카산 시어버터를 시장 가격보다약 50퍼센트 높은 수준으로 구매하기로 가나 북부의 생산자들과 계약을 맺었다. 몇 년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더바디샵이 시어버터를 비싸게 산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이 지역에 '시어 열풍'이 불면서 과잉생산 현상이 발생했다. 농민들은 다른 작물의 재배는 제쳐두고 시어 버터 생산에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먹으려 했다.
시어버터 생산량이 1년에 2톤에서 20톤으로 증가했다. 엎친 데 덮긴 격으로 국제시장의 시어버터 수요량을 과대평가 햇음을 깨달은 더바디샵이 차기 수확기의 주문량을 축소했다.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을 제안 받은 생산자는 이를 '세상은 더 많은 시어버터를 원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시어버터를 그렇게 많이 필요로 하지 않았고, 따라서 높은 가격 때문에 추가로 생산된 부분만큼 시간과 노력이 낭비된 셈이었다.
좌파가 우파 경제학자들로부터 "그렇게 내가 뭐랬냐"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항상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적어도 더바디샵의 경우는 파악이 쉬운 사례였다. '자선적 가격'은 부만 이전시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인센티브에 영향을 끼쳐 뻔히 보이는 왜곡된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런 경우 차라리 (자선기금을 통해) 일시불 원조를 하면 인도적인 목적이 더 효과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 그 또한 분명히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적어도 가격 메커니즘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경제학> 조지프 히스, 본문 179~209 쪽에서 발췌, 정리
- 2009/06/2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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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이요 2009/06/22 11:07 # 답글
참 어려운 문제네요. -.-;
cklist 2009/06/23 07:34 #
그죠, 그런데 한편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목소리가 나오는 게 좀 부럽기도 해요. 꼬투리라도 잡는 사람들이 많아서 되는데, 이건 뭐 대체로 '남일이다' 라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