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면, 수용소 생활 일주일 만에 나는 청결의 욕구를 잃어버렸다. 내가 세면장을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거기에 쉰 살이 다 된 내 친구 슈타인라우프가 웃통을 벗고 서 있었다. 그는 몸을 문지르고 있었으나 별 효과가 없다(비누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목과 어깨를 씻는다. 슈타인라우프는 나를 보자 인사를 한다. 그러다 곧바로 정색을 하며 다짜고짜 내가 왜 안 씻는지 묻는다.
내가 왜 씻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 내게 도움이라도 된다는 건가? 내가 누구의 마음에 더 들게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하루, 아니 한 시간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 반대다. 오히려 수명이 더 짧아질 것이다. 씻는 일도 노동이고 에너지와 칼로리의 낭비니까.
슈타인프라우프는 우리가 석탄 자루 밑에서 30분만 낑낑대노라면 자기와 내가 구분조차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런 생활환경에서 얼굴을 씻는다는 것은 어리석고 심지어 무례하기조차 한 것 같다. 이것은 기계적인 습관일 뿐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절멸의 의례를 처량하게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다. 아니, 이미 죽기 시작했다. 기상과 노동 사이에 여유 시간이 10분밖에 없다면, 나는 그 시간을 다른 데 쓰고 싶다. 나 자신 속으로 침잠하여 결산을 하거나, 이것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늘이나 바라보고 싶다. 아니면 아주 잠시나마 한가로움이라는 사치를 즐기도록, 그냥 그렇게 살아 있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하지만 슈타인리우프가 내 생각을 가로막는다. 그는 세수를 다 했고, 무릎 사이에 끼워두었던, 나중에 걸칠 아마포 상의로 몸의 물기를 닦는다. 그러고는 나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는데, 그 와중에도 자기가 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말들을,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하사관으로서 1914~1918년 전쟁에서 철십자훈장을 받은 슈타인라푸프의 말들을 잊어버려 마음이 아프다. 그의 서툰 이탈리아어와 훌륭한 군인다운 단순어법을 믿음 없는 인간인 나 자신의 언어로 옮겨야 하다니 마음이 아프다. 그건 바로 이런 뜻이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능력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마음씨 좋은 사람 슈타인라우프가 나에게 말해준 것이다. 그 말은 훈련되지 않은 나의 귀에는 생소했고, 부분적으로만 이해되고 수긍되었으며, 좀더 가볍고 융통성 있고 부드러운 가르침으로 바뀌었다. 이 가르침은 수백 년 전부터 알프스산 너머 저편의 사람들에게는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또 그 가르침에 따르면, 다른 하늘 아래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낸 도덕 체게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헛된 일은 없다.
그렇다. 슈타인라우프의 지혜와 충실함은 그에게는 충분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 복잡한 암흑 세계와 대면한 나의 생각들은 혼란스럽다. 정말 체계를 세워서 그것들을 실천해야 할까? 아니면 체계가 없는 것에 적응하며 사는 것을 더 나을까? - 56~58쪽,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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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인리우프의 아름다운 신념보다 프리모 레비의 저 고백이 더 가깝게 와 닿는다. 얼마나 절실하고 정당한 질문인지. 저 질문을 던지는 순간, 프리모 레비는 보편의 인간이 된다.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식으로 인간성을 짓밟히든지 말이다.
평범한 인간은 체계에 동의하거나 또는 동의하지 않거나 하는 극단의 결단 속에 순전하게 머무르지 못한다. 대신 질문하며 나아갈 뿐이다. 그 흔들림으로 보편의 인간은 보편의 인간을 위로한다. 보편의 인간은 보편의 인간을 가르친다. 그것이 연대다.
프리모 레비는 의심하고 견디고 저항했다. 혹은 때때로 그것이 저항인지도 모르는 채 저항하며 나아갔다. 그리고 인간의 질문, 인간의 언어, 문학을 남겼다. 레비의 혼란이, 그에 대한 솔직하고 담담한 고백이 큰 위로가, 힘이 된다.
- 2009/06/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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