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책들을 읽고 있다. 무궁무진하면서도 철저하고 정확하다.
그는 ‘작은 주제를 파고들어야 겨우 손에 잡히는 것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가볍게 뛰어넘어, 넓고 큰 문제로 달려든다. 문제의 크기에 주눅들거나 그 때문에 회의하는 대신 어떤 크기의 문제든 철저하게 파고드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다보면 칸트, 마르크스, 역사 같은 거대한 단어들이 손에 잡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내가 그것들을 이해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고진의 글을 보는 동안에는 그것들 또한 인식과 이해, 나아가 실천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다. 그 '느낌'만으로도 진지함과 긴장감이 생기는 독서. 이런 게 고진을 읽는 즐거움이구나 하고 생각한다.
윤리 21은 전쟁과 식민지지배로 얼룩진 20세기를 넘어, 21세기는 윤리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제목이다.
20세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책임(이 책을 쓰기 전에 전쟁책임 문제를 오래 생각했단다)을 묻다보면, 책임이란 무엇이고, 윤리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을 통해서만 21세기를 이끌 새로운 책임론, 윤리를 세울 수 있게 된다.
고진은 우선 사회나 공동체의 도덕을 ‘도덕’, 세계시민으로서의 도덕을 ‘윤리’로 구분한다. 이때 윤리는 실천적이며, 그 실천은 ‘자유’에서 나온다.
20세기에 벌어진 일들을 두고 사람들은 ‘자기결정권이 없었다’는 이유를 들어 책임을 회피했다. 나치즘에 동조한 독일인이 그랬고, 천황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남의 목숨을 빼앗은 일본인이 그랬다. 이런 식으로 ‘원인’을 짚는 것은 ‘인식’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책임’의 대상이 모호해지거나 없어진다.
그러면 책임은 어떻게 생길까? 어떤 사건에 대해 자신이 원인이라고 상정할 때만 생긴다. 자기가 원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상정할까? 스스로의 자유에 의해 그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고진은 그 ‘자유’에서부터 논의를 풀어간다.
고진이 칸트를 빌려 말하는 ‘자유’는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스스로 자유에 의해 어떤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 즉 ‘자유로워지라’는 당위(의무)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이 있기 때문에, 그 자유로부터 윤리적인 책임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때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포함한다. 칸트는 '타인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라는 것을 보편적인 도덕법칙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벌어진 일에는 책임이 있다. 무지에도 책임이 있다. 그러면 책임을 어떻게 질까? 고진은 일의 과정을 남김없이 고찰하는 것,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평이한 이야기 같지만, 이는 이제까지 도덕적으로 보았던 내용을 인식의 관점으로 바꿔 보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엄청난 이야기다.
책에서는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을 심화함에 따라 비전향 공산당원들이 그만큼 신성시되는 현상을 예로 든다. 이들은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고통을 극복하며 감옥에서 수년을 버틴 사람들로 존경받지만 이는 ‘도덕적’인 판단이다. 비전향=선, 전향=악이라는 도덕적 도식을 버리고 보면, 전향은 이론적 인식과 현실의 어긋남을 인정하는 받아들인 행위이자 더 이상의 현실인식 왜곡을 중단한 행위가 된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게 책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논의는 자신과 타인의 자유에서 비롯한 책임론에서 세계시민론으로 이어진다. 고진은 여기서도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칸트적 전도에 주목한다. 우리가 흔히 공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것인데, 칸트는 그것을 사적인 것이라고 하며, 역으로 거기에서 벗어나 개인(세계시민)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공적인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늘려야 한다 했다.
다시 말하면, 사회나 공동체의 ‘도덕’과 세계시민이 ‘윤리’가 충돌할 때, 우리는 ‘사적’ 이성을 버리고 ‘공적’ 이성을 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공동체 내에서는 도덕적이지만 윤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세계시민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의 사고에 대해 의심하는 이성을 갖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시민론의 또 다른 핵심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다. 이를테면 환경윤리학은 미래의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서 성립된다. 미래의 인간이 살아갈 환경을 위해 우리가 희생한다고 해서 그들이 감사할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감사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우리는 환경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칸트가 말하는 ‘타인을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대하라’는 의무다.
이런 논의 뒤에 고진이 가장 강조하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칸트가 말한 도덕법칙은 지상명령으로 끝나지 않으며, 현실의 생산관계에 미친다는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코뮤니즘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코뮤니즘에 대해서는 임노동(노동력 상품)의 폐기가 핵심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가령 구소련과 같은 사회는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다. 경제적 평등이라든가 풍요로움, 실업문제의 해결 같은 것은 코뮤니즘의 과제는 아니다. 그 정도의 것은 복지국가 혹은 사회민주주의에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임노동의 페기란 바로 '타자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말의 현실적인 형태다. 마르크스에게 그것은 '지상명령' 이었다. 그것은 결코 자연사적 필연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사적으로 보면 자본주의적 경제는 영원할 것이다. 그것을 폐기하는 것은 윤리적인 개입이다. 즉 그것은 '자유'의 차원에서만 오는 것이다.”
“단 하나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자본제 단계로부터 코뮤니즘으로의 발전은 결코 역사적 필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유로워지라' '타자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윤리적 의무로부터 생겨난다. 역사에는 의미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실천적(윤리적)으로만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추진력이 거셀수록 ‘윤리적 개입’이라는 말이 설득력과 힘을 얻는다. 이 책에 비춰 생각해보면, '윤리적 개입'이 '도덕적' 참여와 다른 점은, 그것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넘어선다는 것, 책임을 진다는 것, 무엇보다 철저한 인식을 통해 책임을 진다는 것에 있다.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에 남긴 몇몇 장면을 생각해보니, 그 말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알겠다.




덧글
cklist 2007/05/15 10:45 # 답글
그런가 하면 '자기책임'이란 말도 있다. 가만보면 이 말은 대게 이상하게 쓰인다.이라크에서 저항 세력에 납치된 사람들, 주로 자원봉사자나 활동가들을 두고 그 땅으로 걸어들어간 것은 '자기책임'이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정부도 있었다. 일본이었나... 이라크로 자위대 파병한 원인은 따지지 않고 그런 식으로 논의를 돌려버린다.
자유, 자유의 자기기원성... 이런 말은 꺼내놓는 말이 아니라 속으로 생각하는 말이다. 판단의 기준이고, 스스로 부여하는 자기책임의 기원이지, 누가 누구에게 '자기책임'하며 운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특히 정치적인 관계에서는.
빨간그림자 2007/08/16 04:25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고진의 리뷰를 찾다가 흘러오게 되었습니다.좋은 리뷰를 읽고 링크를 집어갑니다. :)
cklist 2007/08/16 08:08 # 답글
빨간그림자 님 / 댓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님의 블로그도 알게 되었네요^^ 저는즐찾 신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