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3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깨달음일 뿐이다.
그것은 깨달음일 뿐이다.
3권에서는 드디어(!)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도올의 당찬 질문과 폭넓은 지식, 달라이라마의 지혜가 만나 "짝"하고 박수 소리를 내는 격. 도올의 배포도 대단하고, 그걸 왜곡없이 이해하는 달라이라마의 통찰과 겸손도 대단하다. 윤회에 대한 논의에 이르러 조금 삐끗하기는 하나, 이 정도면 가히 세기의 대화이라 할 만하다.
달라이라마를 만난 첫 날, 소란한 거리를 피해 서둘러 호텔에 돌아와, 침대에 팔다리를 大자로 쫘악 펴고 누워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는 도올의 마음이 백번 이해되는고만. (감축드리옵니다, 선생님! 저 또한 빛이 반짝하는 걸 분명히 보았사옵니다.)
* (도올)제가 불교에 대해서 갖는 바램은 불교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불교라는 종교에 관심이 없습니다. 저의 불교에 대한 모든 믿음은 바로 불교가 인간을 종교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 본문 559쪽
* (달라이라마) 불교에서는 아무리 그러한 논의(역사적 예수/역사적 붓다에 관한 논의)가 치밀하게 전해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전적으로 환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불교적 신앙의 체계에 하등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교의 가장 원초적 출발이 싯달타라는 역사적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싯달타라는 인간이 구현하려고 했던 진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근원적으로 색신보다 법신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색신에 대한 어떠한 논의도 법신의 의미를 경감시키지 않습니다. 도올 선생의 말씀을 들으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즉 기독교의 예수에 관한 논의가 너무 사건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낳았고 갈릴리 바다를 잠재우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행하였으며 로마인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또 부활하였다 하는 범상치 않는 사건 때문에 믿는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는 그러한 사건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타가 행한 어떠한 기적적 사건 때문에 불교가 형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입니다. 불교가 문제삼는 것은 불타라는 인간이 우리에게 전한 법이며 진리입니다. 이 법이라는 것도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것 자체로 무오류적이고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깨달음의 한 계기로서의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하나의 법이라도 상황에 따라 다양한 표현을 썼습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기독교와 달리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경전에 대해 전혀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 560쪽
* (도올)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가 유일신관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이해 자체를 사건 중심에서 법(다르마)중심으로 그 축을 이동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 561쪽
* (도올) "불교는 무신론이라는 저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 (달라이라마) "물론이지요!" 유신론의 전제는 반드시 이 세계에 대하여 세계 밖에 있는 창조주를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으며 구세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올) "바로 그것입니다! 진정한 과학의 힘을 믿는 모든 상식인들은 그 상식의 논리에 철저하기만 하다면 모두 무신론자가 될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그런데 무신론자들에게는 무신론의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신론 그 자체가 하나의 심오한 신론이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망각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과학이라는 인과세계의 신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영성을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이기 때문에 저는 21세기 인류사의 정신적 패러다임 쉬프트가 불교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 583쪽
* (달라이 라마) 불교는 창조주도 구세주도 초월자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상이라고 하는 종교적 수행방법을 제시하며,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구원의 윤리를 제시하며, 내세라고 하는 윤회의 이론을 제시합니다. 불교는 신이 없이도 인간에게 무한한 영성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엄연한 종교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성립 요건에 유신론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 584쪽
* (도올)인류의 종교사에 있어서 대중문화, 예술과 관련된 가장 큰 잇슈 중의 하나가 결국 신성을 어떻게 시각화하냐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아주 간단히 나누면 아이코닉 이미지와 언아이코닉 이미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아이코닉 이미지는 대체로 인간의 형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중략) (불교의 경우)아쇼카시대까지만 해도 스투파워십(탑신앙)중심이었고, 그 이전에는 분명 불타를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 본문 626쪽
* (도올)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박트리아 희랍문명으로부터 시작된 쿠샨 왕조의 일반적 문화풍토에서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간다라의 불상들은 후가 미투라불상들과는 달리 매우 인간적인, 아플로를 닮은 미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마투라지역에 이러한 간다라 불상제작의 충격이 전달되지 마투라의 석공들은 독자적인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마투라 불상이 결국 스투파신앙을 계기로 일어난 대승불교운동과 접합되면서 전인도적인 센세이션으로 불꽃처럼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타부시 되어온 입열반의 붓다를 등신의 아이콘으로 제작한다는 것은 정말 대변혁적인 발상의 전화없이는 불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견제, 부정, 혹은 선도라는 차원에서 반야사상이 성립한 것입니다.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하는 말씀은 반야사상을 표현한 명구라 하겠습니다. 즉 싯달타가 붙다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색신과 관계없는 만고불변의 지혜(반야)때문이며, 따라서 불의 상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상을 상다웁게 만들고 있는 지혜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반야의 완성은 오히려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상이 상이 아니라는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며, 이러한 부정의 논리에서 공사상이 발전한 것입니다. - 616~645쪽에서 요약
* (도올) 기독교는 사건중심이고 불교는 법중심이라 말씀하셨는데, 그 법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달라이라마) 연기입니다. / (도올) 연기를 인과라는 말로 바꿔도 되겠습니까? / (달라이라마) 상관 없습니다. / (도울) 이 우주의 모든 사태는,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두 시간과 공간 안에서 다 일어나는 것이겠군요. / (달라이라마) 그렇습니다. / (도올) 시공간 밖에서 일어나는 사태는 연기론에서는 인정이 안 됩니까? / (달라이라마) 그렇습니다. - 658쪽
* (달라이라마)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석가여래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한 마디가 그의 전 생애를 마감하는 최후의 일성이었습니다. 불교에 있어서 구태여 절대적 진리를 말하자면 공이라는 한 마디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것을 절대적 실체로 생각하면 그것은 공의 아닌 것입니다.
* (도올) 그렇다면 불교는 현상적 일원론입니까?
* (달라이라마) 물론입니다. 모든 일원론은 현상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양철학의 한계는 애초부터 현산 그 자체를 무시하고 들어간다는데 있습니다. 이것 또한 기독교와 관련된 사유체계가 파생시킨 뿌리깊은 오류이지요. (그러나)일원론은 현상론적 일원론밖에는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본체론적 일원론, 본질론적 일원론은 또 다시 이원론으로 환원되디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아드바야(advaya), 즉 '불이(不二)'입니다. - 667쪽
* (달라이라마) 연기란 무자성, 곧 결국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있으며, 상호관련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공(空)입니다. 불교에서 무아라고 하는 뜻은 아라는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거나 나의 완전한 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에 대한 이해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소멸이 아니라 마음의 혁명입니다. 혁명이란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 687쪽
* (달라이라마) 한 인간에게 있어서도 너무 깨달음을 현재적 순간의 절대적 경지로서 파악하는 것은 연기적 세계관에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저는 선승들의 그런 주장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 688쪽
* (달라이라마) 이성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죄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성에 관한 모든 논의는 그논의가 되고 있는 맥락이라는 어떤 삶의 장을 떠나서 이야기될 수 없습니다. 이성은 반드시 어떤 필드 속에서의 이성에 관한 논의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성 자체가 천수관음처럼 무한히 다른 모습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이성의 가장 큰 문제는 모두 실체화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체화된 이성의 역사는 계속 다른 실체와 대적하거나 대치되거나 할 뿐이라는 거죠. 그런 방식의 이성의 이해는 대립, 기만, 극복, 투쟁의 자취만을 남깁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이성은 어떤 경우에도 실체화될 수 없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마음에 관한 논의입니다. 마음은 식(識)이며, 식은 인간의 의식작용의 총제적 측면들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불교에 있어서의 이성적 탐색은 반드시 자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성적 깨달음의 궁극에는 모든 것은 결국 연기적으로 관계되어 있는 존재며 실체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공의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공의 체험은 이성적 자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이성적 자각의 절대적 가치가 따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이성은 반애야 포괄되는 것이며 반야는 실천이며 행위입니다. 이성적 깨달음이 곧 자비의 행이지요. - 705~707에서 요약
* (달라이 라마) 도올 선생님! 인간이라는 게 본시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너무도 거대한 우주입니다. 너무도 복합적이지요. 저도 어느날에는 무한한 확신이 들어서 매우 야심적인 인간이 됩니다. 그러다가 다음날에는 다른 생각이 들면서 풀이 죽곤합니다. 그러면 매우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이런 감정의 기복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힘내십시오! - 709쪽
도올 선생님, 달라이라마 님!
참으로 명쾌한 대화었습니다. 어찌 감히 사족을 달겠습니까!
참으로 명쾌한 대화었습니다. 어찌 감히 사족을 달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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