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옥(도올) /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2 인문학 (책)

달라이라마와 도올의 만남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2권은 (달라이 라마를 만나러 간)도올의 인도 여행기. 1권의 긴장을 잠시 뒤로하고,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도의 불교 성지들을 둘러보는 기분이랄까. 보다 편하다.

1권에서 열강을 펼치시던 선생님은 어디로 가셨는지... 2권에서는 때론 소탈하고 때론 깐깐한 중년 아저씨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끔 독단적이고 옹졸하다 싶지만, 그래도 읽으면 읽을수록 고개를 숙이게 된다. 결국 이 냥반의 학자로서의 자부심, 열정, 성실함, 학생으로서의 겸손함은 나 같은 사람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수준의 것이라는 결론에 닿기 때문.

특히 책의 초반에 도올이 달라이 라마를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소개되는데, 그 소망의 간절함, 노력의 치밀함, 행동의 결단성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이 냥반 정도되면 그러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역시 뛰어난 학자는 동시에 뛰어난 학생인 법.

* 우리가 보는 불상 속에는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현실적 인간의 모습이 없는 것이다... 보다 신적인 예수는 우리게게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반면, 보다 인간적인 싯달타는 우리에게 신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실 역사적으로 대승불교가 우리에게 끼친 해악 중의 하나이다. 싯달타라는 인간이 증발되어버린 것이다. - 본문 268

*  소승불교에는 이러한 등신불의 시각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아이콘의 구체형상이 없다. 즉 사람의 형상으로 붓다를 기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다를 사람의 형상으로서 시각화할 때 그것은 불교의 무아론의 근본취지에 어긋날 뿐 아니라, 붓다를 하나의 실체로서 신격화하고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위험성이 크다. 그러기 때문에 붓다는 그의 제자들이 진리만에 의거하며 살 것이며, 자기라는 인간의 형상에는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따라서 원시불교에는 일체의 등신불의 형상이 허용되질 않았다.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AD 1세기말부터, 대승운동이 태동되면서부터 생겨나게 된 것이며 불교 운동사에 있어서 그것은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 본문 341

* 감은사지의 가람배치는 향후의 모든 가람의 심층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본래 붓다의 유골을 안장하던)탑의 순수조형으로서의 전환은 동아시아문명에 상륙한 스투파(무덥=탑)의 한계이자 운명이었다. 우선 스투파를 스투파이게 하는 그 핵심적인 의미체인 싯달타의 육신의 뼈다귀 원품을 구할 수 없었단는 것과, 이미 대승불교 초기로부터 반야사상의 흥기는 스투파공양에만 집착하는 미신적 성향에 대한 반성을 심화시켰다는 것, 그리고 중국인의 현실주의적 감각은 스투파라는 추상체보다 인간중심적인 불상의 형상을 선호했다는 것,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권에 있어서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왕권과 결합이 불가피했다는 것, 등등의 이유로 스투파는 <대반열반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그러한 원래의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본문 382

* 싯달타는 나에게 예수보다는 더 리얼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나사렛에서 예수가 목수노릇햇던 목공소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싯달타의 유적지에는 그러한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주변의 산하의 모습이나 그곳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의 삶의 모습이 아직도 그 당시의 모습을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인도는 고조선의 푸른 이끼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문명이다. - 본문 398 (이건 사르나트에서 경험 했었는데, 정말이지 절절히 공감~)

트랙백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TrackbackURL : http://cklist.egloos.com/tb/2876798 [도움말]

덧글

덧글 입력 영역